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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바머를 다룬 미드 맨헌트와 영화 테드 K

알달세놀 2023. 1. 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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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바머에 대해서 미드 맨헌트와 영화 테드 K를 통해 알아보자.

유나바머의 본명은 시어도어 존 카진스키로 미국의 수학자이자 테러리스트입니다. 1969년 갑작스레 교수직을 사임하고 몬태나 주의 숲 속으로 들어가 고립생활을 보냈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을 망치는 주범이라 인지하고 그에 맞서 싸우려는 시도로 17여 년간 사업가, 과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편지 폭탄을 보냈는데, 초기에 주로 대학과 항공사를 공격해 유나바머(Unabomber,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와 관련된 미드 맨헌트와 영화 테드 K를 통해 그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넷플릭스 미드 맨헌트 유나버머의 포스터
맨헌트 유나바머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이다.

 

목차
1. 유나바머의 유년시절
2. 유나바머의 탄생
3. 유나바머 선언문
4. 유나바머의 체포

 

1. 유나바머의 유년시절

유나바머는 1942년 5월 22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폴란드계 이민 2세대인 시어도어 리처드 카진스키와 완다 도백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학교 개혁에 직접 참여할 정도로 교육에 대해서 열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형편이 좋은 제조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따금 아이를 데리고 도보 여행을 갈 정도로 자녀 교육에 대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지만, 나중에는 대학에서 다시 공부해서 교육학 학사학위를 받았을 정도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집은 서재도 갖추어져 있어서 풍부한 독서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영화 유나바머 테드 K 포스터
유나바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테드 K

 

유나바머는 활달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전해지며, 학교 성적도 아주 좋아서 선생님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훗날 형을 신고하게 되는 그의 동생 역시 머리가 좋았는데, 수학자가 된 형과는 달리 노숙 아동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나바머는 1959년 장학금을 받고 16세의 나이에 하버드 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재학 중에 심리학자 헨리 머레이의 실험에 참가한 것이 그의 심리를 공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미드 '맨헌트'에서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유나바머 대학시절 모습
유나바머의 대학시절 모습은 평범해 보인다.

 

유나바머는 1964년 졸업 이후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하여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7년 완성된 박사학위 논문은 대학 내의 상을 수여받는 등 뛰어난 평가를 얻었습니다. 그는 1967년 당해에 25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에서 최연소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2. 유나바머의 탄생

유나바머는 1969년 2년 만에 갑작스레 교수직은 사임하고 몬태나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2년 남짓을 지낸 이후 1971년 숲 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에서 문명을 등진 채 혼자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산업사회의 문명을 멀리하고 원시적인 자급자족의 생활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수년 동안 고립생활을 보내다가 1978년부터 우편물 폭탄 테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연구소와 공항이 주요 타깃이어서 유나(un+a) 바머라 불린 그의 16번에 걸친 테러로 3명이 숨지고 23명이 실명 등 부상을 입었습니다.

 

유나바머가 지냈다는 숲속 오두막와 우편물 폭탄
유나바머가 고립생활을 했던 오두막과 그가 보낸 폭탄 우편물 실물사진

 

최초의 태러 피해자는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대학원생과 경비원이었고, 1979년 그의 우편물이 비행기로 배달되는 도중 폭발하여 12명의 승객이 부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자 FBI가 관여하여 수사에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카진스키는 유나이티드 항공의 사장 퍼시 우드에게 폭발물을 보내며 악명을 높였습니다. 그의 폭발물은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져 갔고, 타깃은 여러 유명 대학의 교수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새크라멘토에서 컴퓨터 상가 업주가 폭발물로 목숨을 잃으면서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1994년과 1995년에는 일반인 2명이 폭발물로 사망하였습니다.

3. 유나바머 선언문

1995년 유나바머는 산업 사회와 그 미래(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라고 이름붙은 긴 선언문을 보내어 신문에 기재할 것을 요구한 바가 있습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FBI 측의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유나바머의 정체를 특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아 워싱턴포스트가 1995년 9월 19일 그의 특별 기고문을 출판하였습니다.

 

유나바머 선언문의 내용
유나바머 선언문은 기술 사회에 대한 비판에 대한 5가지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4. 유나바머의 체포

유나바머의 선언문은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동생인 데이비드 카진스키에게 유나바머의 정체가 바로 자신의 형임을 의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데이비드는 FBI에 글의 요지와 문체가 자신의 형의 것과 유사하다는 제보를 보내었고, 1996년 4월 시어도어는 그의 오두막집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정신이상'을 변론 전술로 삼자는 변호인단의 제안을 일축하며 재판에서 자신의 논지를 이성적으로 피력, 1998년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유나바머가 의료병동으로 이동하는 최근 사진
교도소 의료센터로 이송 중인 유나바머의 최근 사진이다.

 

유나바머는 매우 높은 수준의 보안으로 알려진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2021년 12월 1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버트너 연방교도소의 의료센터로 이송되었습니다. 수감 중에도 그는 여러 편의 에세이들과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미국 정부를 책 출간을 한사코 막으려 했지만 연방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평가했고, 대신 인세 전액을 피해자와 유족 보상금으로 쓰도록 판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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