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지배했던 가문입니다. 인구 30여만 명에 불과한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존재로 인해 르네상승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수백 년 후의 오늘날 시민들까지 조상들의 후광에 힘입어 관광객을 대상으로 경제적 보상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피렌체, 현재의 피렌체,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미래의 피렌체에도 예술적 부유함을 안겨 줄 이 가문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1.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피렌체만큼 세계적인 예술의 집합소이자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도 드뭅니다.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메디치 가문 때문일 것입니다. 출신도 보잘것없는 한 가문이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아니 유럽 전역에 걸쳐 그 영향력을 펼친 세계적인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것은 그 영향력이 상업과 정치라는 현세적인 분야뿐 아니라 종교적 분야, 그리고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한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통해 급기야 르네상스에까지 미쳤습니다.
2. 메디치 가문의 시작
메디치 가문은 썩 훌륭한 집안 출신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족보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가 조상이라고 하는데 이를 믿는 사람은 그들 가문 출신 외에는 없습니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 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점차 사회의 윗단계로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메디치라는 이름은 1230년의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메디치(Medici)'는 이탈리아어에서 '의사'를 뜻하는 '메디코(medico)'의 복수형으로, 이들의 조상이 의사나 약제사, 염료 상인 등의 직업을 가졌던 데에서 그러한 가문의 명칭이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3. 메디치 가문의 번성
메디치 가문은 13세기 이후 그 영향력을 점점 키워갔는데, 1378년에는 살베스트로가 알비치 가문이 주도하던 과두정부에 맞서서 하층 노동자들과 신흥 상인들이 연합해 일으킨 촘피의 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은행업에 진출한 비에리 드 메디치는 로마 교황청과 연계해서 부를 쌓았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데 메디치 때에 이르러 피렌체를 지배하는 가문으로 세력이 커졌습니다. 조반니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했으며,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 시기에 대립교황 요하네스 23세를 지원해 로마 교황청의 재무관리자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행정장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조반니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지배권을 확립하였습니다. 그는 1433년 피렌체에서 추방되기도 했으나, 이듬해 알비치 가문을 쫓아내고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도시들만이 아니라 런던과 아비뇽 등 유럽의 다른 지역들로도 은행의 지점을 확대해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아울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도나텔로 등을 후원하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만들어 마르실리오 피치노로 하여금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해서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도 기여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피에로 데 메디치도 레온 바티스타 알베스티, 도나텔로, 필리포 리피, 베노초 고촐리, 산드로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를 후원하고, 수많은 책들을 수집, 보급해 문예 부흥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 때에 이르러 메디치 가문은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위대한 자)'라고 불리기까지 한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이탈리아와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를 후원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끌었습니다.
4. 메디치 가문의 몰락
한편 로렌초 데 메디치의 조카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알레산드로란 인물을 피렌체의 세습공장에 임명했는데 그가 바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혼인할 수 없는 교황의 아들이니까 사생아였습니다. 그러나 알레산드로는 그 출생이 불법적인 것처럼 예술을 사랑하고 폭력을 증오하던 메디치 가문 출신과는 다르게 매우 잔인하고 독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친척이자 동료에 의해 암살당하였습니다.
로렌초의 먼 후손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토스카나 대공에 올랐고 이 가문은 프랑스 왕비에 오른 마리 드 매디시스를 배출했으며 18세기 전반까지 토스카나의 권력과 더불어 메디치 가문의 명성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 영향력을 줄어들었고, 결국 코시모 3세의 딸이자 팔츠 선제후 요한 빌헬름의 미망인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가 죽은 뒤 가문은 단절되었습니다.
5. 메디치 가문의 현재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얻게 된 엄청난 양의 예술품들을 어떻게 되었을까요? 루이사는 메디치 가문의 모든 예술품을 토스카나 대공국과 피렌체에 기증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오늘날 피렌체는 세계의 관광객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메디치 예배당에는 다양한 작품들과 미켈란젤로의 명작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본가의 경우에는 남계 혈통이 끊겼으나, 분가인 오타이아노 메디치 가문은 오늘날에도 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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